서론
이사를 가기로 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나중에 가구가 불만일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샀는지 알 수 있고, 같은 고민을 할 때 시간을 아낄 수 있도록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고시원에 살다가 투룸으로 이사하다 보니 짐이 별로 없어 이사 전날에 박스 한두 개 보내고 당일에 필수품들만 챙겨서 택시 타고 가면 될 것 같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걸 반대로 생각하면 가구를 잔뜩 사다 방에 채워 넣어야 한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심지어 해당 투룸은 옵션이 에어컨과 싱크대밖에 없었다. 내 친구는 냉장고와 세탁기도 사야 할 판)
그래서 가구를 둘러보는데 가구를 정하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공간과 예산이 모자라다는 것도 있지만, 그 방에서 천년만년 살게 아니고 내가 취직 후에 돈이 모이면 직장 근처로 이사하는 걸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가구를 사는데 정한 우선순위는 다음과 같다.
1. 삶의 질(내가 해당 가구를 사용하면서 편리함과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가구의 기본.)
2. 이사의 편의성(이사할 때 답이 없어 버리고 가야 하는 거면, 내 친구는 즐거워할 수도 있지만 나는 불쾌할 것이 분명하다.)
3. 청결함(청소나 빨래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면, 남자 둘이 사는 집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4. 예산의 적절성(42서울 세후 월급 91.2만 원... 급하면 사이버 머니를 꺼내 써도 되고 그동안 모아둔 돈도 있지만, 역시 아껴 써야 하는 금액이다.)
5. 아름다움(당연히 이쁘면 이쁠수록 좋지만, 위의 것들을 어겨가며 이쁜 건 의미가 없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필요한 가구들을 생각했다. 침대, 옷장, 서랍장, 책상, 의자 등등... 각각의 물건들마다 위의 우선순위를 고려해서 하나씩 정했다.
1. 침대(-> 토퍼)
가장 많이 고민한 게 침대였다. 다른 건 분해를 해서 가져간다는 선택지가 존재하는데, 침대 매트리스는 분해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은 아직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사실 세상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는데 나는 못 찾았다.
그래서 매트리스는 과감하게 포기했다. 본가에서도 원목 침대에 라텍스 매트리스 10cm 정도 되는 물건을 쓰니까 토퍼를 쓰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고른 것이 [브랜드리스 녹턴19 토퍼]였다.
사실 가장 많이 고민했던 가구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우선순위를 못 지킬 수도 있지만 수면에 돈을 아낄 수는 없었다. 42서울을 다니며 불면증에 시달렸던 이유가 과제에 대한 지나친 몰입 탓이 절반, 고시원의 불편한 잠자리가 절반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잠자리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대안들을 알아보다가 시국이 시국인지라 매장을 돌아보기는 어려워서 예전에 한번 누워본 브랜드리스로 과감하게 결정했다.
이사의 편의성 때문에 돌돌 말아 접을 수 있는 토퍼를 살까도 고민했는데, 엄청 큰 사이즈가 아니면 니로 ev 트렁크에 싱글이나 슈퍼싱글 토퍼가 안 들어가겠냐 하는 안일한 생각도 있고, 이거보다 큰 물건을 더 들일 계획은 없어서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적당한 생각으로 넘겼다. [이 글]이 결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청결함 역시 고민이었는데, 비교적 얇은 토퍼만 쓴다고 해도 바닥에 바로 내려두고 쓰는 건 역시 좀 찝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찾은 게 [알뜨리 신소재 매트리스 받침대] 였다. 침대 프레임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하면서, 원목이 아니어서 가볍고 분해가 돼서 이사할 때도 편할 것 같았다. 가격은 아주 잘 만든 원목 깔판과 비슷했다. 나무 살 사이가 많이 비어있는 싸구려 원목 제품보다는 비쌌지만, 그런건 토퍼 밑에 두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위에 침대가 올라가면 다 가려질 것이기 때문에... 다만 가로 크기가 가장 작은 게 110cm라서 토퍼를 슈퍼싱글로 사야 적절할 것 같아서 토퍼 쪽에서 비용이 더 늘어나긴 했다.
구매 후기.
받침대는 주문한 다음날 바로 왔는데, 토퍼가 3주 만에 도착했다. 나는 매트리스가 아닌 매트리스 받침대에 이불을 피고 자는 생활을 하다가 궁금해서 전화로 문의하니 금요일에 도착하며 배송이 늦어진 점에 대해 정말로 죄송하다는 답변을 듣고 살짝 당황했다. 항의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냥 일정이 궁금해서 전화한 거였는데...
그렇게 모두 온 뒤에 한숨 자보니 받침대와 토퍼 모두 정말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 드라마틱하게 '우와 정말 잘 잤다!!!' 이런 기분으로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꿈을 꾸지 않고 푹 잔 듯하며, 평소보다 수면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짧았는데도 똑같은 느낌으로 일어난 걸 보면 확실히 좋은 잠자리는 숙면에 도움이 된다.
다만 살 때 예상한 것보다 토퍼가 더 무거운 편이었다. 여차하면 이사할 때 당근에 알아서 가져가십시오 하고 팔거나 친구를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2. 옷장(-> 행거)
옷장을 고민하면서 가장 중요했던 건 삶의 질보다는 이사의 편의성이었다. 옷장이 좋다고 내 삶이 좋아질 일은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옷장을 살지 고민할수록 옷장을 사는 건 이사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분해를 할 수 있어도 부품의 크기가 거대한 제품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냥 옷장을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에 옷을 걸어둘 수는 있어야 하니까 행거를 사기로 했다. 어차피 계절이 바뀌면 못 입을 옷은 본가에 들고 내려갈테니, 생활하는데 쓸 옷만 보관할 수 있으면 되니까 엄청 큰 옷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할 때 편할만한 행거를 찾은 게 [폴딩 시스템 행거] 였다. 특별한 조립이나 분해가 필요 없이 접어서 가져갈 수 있다는 게 엄청난 장점처럼 느껴졌다. 생각보단 가격이 좀 높긴 했는데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구매했다.
구매 후기.
생각보다 내 옷이 더 적었다. 빽빽하게 널면 행거 하나만 있었어도 다 해결되었을 것 같다. 그래서 옷도 좀 여유롭게 널고... 남는 데에 옷걸이도 보관하고... 밑에다 이거 저거 두면서 최대한 활용해보고 있지만, 그냥 돈 아끼고 하나만 살걸 하는 생각이 남는다. 뭐 언젠가 다 쓰겠지.
3. 서랍장과 선반
침대 옆에 두고 안경, 핸드폰 등의 간단한 짐이나 알람시계로 쓸 [무드등]을 올려둘 선반(일명, 침대 협탁)이 필요했다. 다만 침대가 12cm+4cm로 매우 낮기 때문에 선반도 낮아야 했다.
그래서 찾은 게 [원목 미니 협탁 테이블] 이었다. 나는 하판에 짐을 올려둘 생각이니 상판과 하판을 바꿔서 조립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리뷰가 있었다.
위에 무드등을 올려뒀을 때 밑에서 잘 안 보이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있었는데 그런 문제가 해결돼서 구매하기로 했다. 이사할 때 짐이 많으면 분해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사실 그럴 것 같진 않다. 조립된 상태여도 공간을 많이 차지하진 않고 원목은 분해했다 조립했다 하면 안 좋으니까.
서랍장은 안 살까도 고민했는데 결국 하나 사기로 했다. 영양제나 화장품을 바닥에 두고 보관하려니 지금은 상관없어도 겨울에 보일러를 틀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 화장대 비슷한 느낌의 서랍장을 사기로 했다. 가격이 싸면서 이사하기 좋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았다.
그래서 찾은 게 [모노 5단 서랍장] 이거였다. 가로 600이면 니로 트렁크에 눕혀서 적당히 들어갈 것 같고, 무게가 가벼워 쉽게 들어서 옮길 수 있어 보이면서도, 잡다하게 정리해야 하는 짐들이 다 서랍장에 들어갈 정도로 커 보였다. 가장 위에 화장품과 영양제를 두고, 그 밑으로 다른 짐들을 정리하면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여 구매하기로 했다.
구매후기.
무드등은 맘에 들고 잘 쓰고 있음.
원목 협탁은 생각보다 조립이 너무 힘들었다. 사실 조립이 힘들었다기보단 원목 가구를 다른 가구 살 때 준 손바닥보다 작은 드라이버로 조립하려고 한 게 잘못이었다. 그래서 다이소에서 큰 드라이버와 목장갑 사다가 조립하니까 뚝딱하고 완성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조립이 어렵다는 리뷰를 많이 남겨준 걸 보면 저 가구 자체의 문제점이긴 한 것 같다.
서랍장은 괜찮게 사용 중. 처음에는 플라스틱 판이 너무 얇아서 이거 뭔가 무거운걸 많이 보관하긴 나빠 보이는데, 어차피 짐이 별로 없어서 5단+상판에 잘 나눠서 두니까 문제 될만한 무게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4. 책상과 의자
책상은 친구가 자기가 쓸 책상을 회사에서 하나 들고 온다고 해서 그 책상에 맞는 책상을 찾아야 했다. 만약 책상은 이사하기 번거롭다면 두고 가는 것까지도 생각하고 구매하기로 했다. 생활하면서 좋으면서 이사하기 편리하고, 친구가 가져온 책상과 상판 높이가 동일한,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책상을 구하기는 매우 까다로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부분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가 책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바닥에 두고 살 수는 없다 보니 책을 보관할 수 있는 선반이 달린 책상으로 구매했다.
의자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클러스터가 문을 닫았을 땐 당연히 삶의 질을 따져 하루 종일 앉아있을 좋은 의자를 사려고 했는데 다행히 클러스터가 열려 자택 근무를 가정하고 의자를 살 필요까지는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 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있지 않으니 이사 등 다른 부분들을 고려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사하기에 좋은 사무용 의자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분해를 해서 들고 간다고 해도 아무래도 많은 공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의자들을 살펴보다가 잠시 책상을 보는데 특이한 리뷰를 발견했다.
이걸 보고 짐볼 의자를 검색해봤는데 의자와 짐볼이 결합된 형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싸고 그냥 짐볼만 쓰는 것도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는 말에 혹해서 짐볼을 사기로 했다. 이사할 땐 공기를 빼서 트렁크 구석에 던져두면 되니 정말 편할 것 같다. 원래 짐볼은 키 - 110 정도를 하면 된다 그래서 65cm짜리를 사려고 했는데, 짐볼은 크기를 재는 방식이 특이해서 의자 대용으로 쓰려면 더 큰 게 맞다고 해서 75cm짜리 짐볼을 샀다.
구매 후기.
친구가 벽면이 3.3m이고 자신의 책상이 180cm이니 150cm 정도 되는 책상을 사는 게 좋을 거라 그래서 그렇게 샀는데 책상을 조립하고 둬보니 30cm 정도 여유가 있었다. 친구가 자기 책상의 길이를 잘못 알고 있었음.
그래서 두 책상 사이에 선반이 가게 조립해서 서로의 시선을 조금 차단하고 남은 공간에 주방 가전을 둘 수 있는 선반을 하나 뒀는데, 생각보다 괜찮게 배치된 것 같다.
다만 살 때 생각한 대로 나중에 이사할 때 어떻게 들고 가나 하는 생각이 남긴 한다. 이것도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지
짐볼로 의자를 대체한 건 그럭저럭 괜찮은 선택이었다. 다만 허리 통증도 줄어든듯한 체감이 있지만, 팔을 받칠 곳이 없어서 컴퓨터를 오래 쓰면 어깨에 피로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책상에 설치하는 팔 받침대를 구매했는데 책상에 달수가 없어서 그냥 이대로 지내는 중이다.
결론
이렇게 가구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측량하고 고민해서 구매한 다음 배치하며 채워 넣은 게 처음 해본 일이었다. 돈은 많이 썼지만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이 공간에 좀 더 애착이 가는 듯하다.
입주 전에 청소할 때 베란다에 있는 곰팡이를 열심히 닦았는데, 빨래를 널다 보니 습기가 걱정되긴 했다. 온습도계를 사서 보니 빨래를 널면 80% 가까이 올라가는 습도를 보며 제습기를 사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10만 원이 넘는 가전은 고민을 좀 해봤을 것 같은데, 제습기나 모니터는 살 때 뭘 살지를 고민하지 왜 사야 하는지는 깊게 고민 안 했다. 아무래도 씀씀이가 커질 모양이어서 당분간 소비를 경계하며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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